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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잊혀진 3월의 호국영웅 해병대 고 진두태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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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4-0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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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0ccbbf3b1b8.bmp 이 상 구

(칠북.칠서면 예비군 중대장)

6.25전쟁이 한창 중이던 1951년 3월 8일 강원도 대관령 박지산전투에서 진두태 수색소대장은 적의 기습공격을 받자 분대원을 탈출시키고 본인은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날은 진두태 소대장의 24회 생일이였다.

90년대에 와서 이분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면서 금년도까지 포함하여 총 4회(96년, 98년, 2002년, 2013년)에 걸쳐 호국인물(護國人物)으로 선정되어,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기념행사를 했으나, 정작 이 지역출신인 진두태 해병대중위에 대한 추모행사는 고사하고, 이런 사실을 아시는 분은 친인척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국영웅 진두태(陳斗台)님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도 함께 소개하고자 하며, 이 기회에 올바로 수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사실 해병대 고(故) 진두태 중위의 고향은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였고, 부친은 진상근(일부자료와 비석에 진상곤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오기임)이며, 4남 1녀 중 막내였다. 현재 유족으로는 여동생과 조카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으나 직계가족은 없다. 고(故) 진두태 중위는 창녕 남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10월에 국방경비대 지원입대(18세)하면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49년 4월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지원하여 진해에서 병조장(지금의 상사)으로 교관생활을 했으며, 이때 얻은 별명이 “백두산 아가리(목소리가 매우 컸기에 붙여짐)”였다.

동년 12월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면서, 타고난 용맹성을 발휘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해병대 명성을 더 높였다.

6.25전쟁 발발 후 고길훈 소령의 부대원으로 군산 이리지구전투(50년 7. 16~21)에 참여하면서 파란만장한 전투실상을 맛보게 된다.

군산지역에서 정찰중 적의 집중공격을 받았는데 이중 7발이 대퇴부와 팔등에 관통되었고, 이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7. 19일 오전). 적 포로 생활 중 미공군기의 포격 시 탈출하여, 9월말에 인천에 있었던 본대로 복귀하였다. 이때까지 본인이 전사처리 된 것과 소위로 특진 된 것을 몰랐고, 12월경 진해로 부대이동 후 자신의 묘를 찾아 대성통곡했다.

특히, 탈출기간 중인 8월초 마산 진동리 지구전투에서 고길훈 소령을 비롯한 옛 동료들이 북괴군을 초전에 격멸시킨 공적으로 일계급씩 특진할 때, 진병조장도 같은 전투공적으로 소위로 특진된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자료가 시중에 떠돈다.

사실, 군산에서 적진을 탈출하여 야음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이동중이였는데 어떻게 마산 진동리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어불성설이다. 실제 특진일자는 50년 7월 25일이며, 특진사유는 군산 이리지구전투 유공 때문이다.

10월초 원산으로 이동하여, 원산 함흥지구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2월 초 진해로 이동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이때에도 전투복 상의 단추를 잠그지 못할 정도로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었다.

51년 1월말 다시 작전명령에 따라 안동 영덕지구 전투를 거쳐 강원도 묵호로 이동하였으며, 3월 3일 정식으로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해병대 간부사관 3기). 동년 3월 8일 오전 연대장 김성은 대령이 지휘하는 3대대 소속 수색소대장으로 정식적으로 해병대 소위계급장을 달고, 대관령 박지산(1,391m)지역전투에서 1개 분대를 지휘하여 허리까지 차는 눈길을 누비며 적정 수집을 위해 수색정찰을 하던 중, 북괴군의 3개 소대 기습공격을 받은 진소대장은 분대원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 혼자 남아 적과 교전을 했고, 중과부적으로 적의 집중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소위가 된지 1주일도 안되어,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 전사를 했다.

고 진두태소위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52년 11월 10일 진두태 해병소위는 중위로 1계급 특진을 하셨고,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처참하게 산화하신 호국영웅님께서 지하에서나마 잠시 웃음을 되찾은 날 이였을 것이다. 보훈처에서 매년 선정하는 이달의 호국인물에 총 4회에 걸쳐 영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받았다. 처음으로 선정된 96년 3월 2일 전쟁기념관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했으며, 두 번째가 98년 3월, 세 번째가 2002년 2월, 네 번째가 2013년 3월 이였다. 이렇듯 호국영웅으로 4회에 걸쳐 국가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칠서 이룡리 고향집 앞에 그 흔한 프랭카드 하나 걸거나 걸려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1년 10월 6일 창녕 남지, 남지초등학교에서 흉상제막식을 했었고, 2007년 3월 중순 ‘삼칠 줄다리기 행사’ 때 한번 지역주민들에게 소개되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고 진두태 해병대 중위처럼, 칠서면 대치리 출신 고 김만술 대위가 있다.

고 김만술 대위는 53년 7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베티고지(지금은 북한 지역) 전투에서 소대장이 사망하자 상사에서 소위로 현지 임관 후 소대장으로 중공군 2개 대대 규모의 병력(800명 정도)을 맞이하여 수회에 걸친 공격으로 적의 절반을 사망케 하고 격퇴시켰다. 김소대장이 지휘한 소대원 30여명 중 생존자는 12명뿐 이였다. 이렇게 큰 공은 세웠던 고 김만술 대위는 작년 5월에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어 함안군의 위상을 높였었다.

최근 북한의 핵폭발실험과 잇단 북한의 불바다발언, 김정은의 군부대방문증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불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이런 행태로 인해 북한의 혈맹관계인 중국조차 북한에 등을 돌리고 있는 시점에서, 북괴군과 맞서 싸운 두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 자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이 지역 출신 두 분의 호국영웅을 몰라서 홀대했다면, 오늘 이후부터는, 이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고향선배로, 전쟁영웅으로, 고장을 빛낸 분으로 제대로 모셔야 할 것이다.

함안의 역사를 되돌아 봤을 때, 임진왜란 때나 6.25전쟁 때 비록 짧은 기간이였지만, 함안이 적의 수중에 함락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후손된 우리의 몫이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두 분의 호국영웅을 중심으로 함안이 충절의 고장임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한다.

이것이 두 분의 희생으로 얻게 된 지금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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