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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광복 75주년, 여전한 미완의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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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8-1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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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여전한 미완의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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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은 일제 당시 조선의 으뜸가는 파락호(破落戶)였다.

 

파락호란 양반집 자손으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으로 그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노름판이란 노름판은 모조리 돌며 재산을 탕진했다.

 

그는 심지어 시집간 외동딸이 장롱을 사기위해 시댁에서 받은 돈마저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사람들은 집안을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대대로 이어온 종갓집과 논과 밭,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이 넘는 전 재산을 모두 날리고 해방 다음해 1946426일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훗날 독립군들의 비밀자료에서 김용환 선생의 행적이 밝혀졌다. 노름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재산이 고스란히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졌던 것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왔던 김용환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린 김용환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가 발각돼 왜경에 의해 수모를 겪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의병 항쟁을 하였으며 이후 의용단에 가입하여 만주 독립군에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며 일본 경찰에 세 번이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후 도박으로 종가 재산을 모두 날린 노름꾼 행세를 하며 철저히 신분을 숨겼다.

 

임종 시 오랜 독립군 동지가 이제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자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굳이 이야기 할 필요 없다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김용환 선생은 결국 사진한 장 남겨놓지 않고 떠났지만 광복된지 50년이 지난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그의 집안은 항일 운동 명문가로 김흥락과 그의 직계 후손들은 무려 11명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제자 60명도 훈장을 받았다.

 

광복절은 우리나라의 4대 국경일 중 하나로 1945815일에 일제로 부터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과 수탈의 굴레에서 어렵게 벗어난 8·15의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여전히 우리사회는 친일의 후손들이 득세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일각에서는 친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일제 치하가 우리를 발전하게 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건국절 논쟁으로 일제하의 독립 운동사를 지우려 시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후손들이 부끄러움이나 반성은 커녕 친일의 보상으로 얻은 거액의 땅을 찾기 위해 소송을 펼치도 했다. 일부는 재산을 찾아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반면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은 온갖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은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졌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금도 힘겹게 사는 자손이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숱하게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또한 일제에 부역하며 동포들을 억압했던 수많은 친일파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권력을 쥔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들이 득세할 경우 자신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는 초조함에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 운동가들은 그토록 바라던 해방조국에서 오히려 친일파에게 핍박받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결과 해방이후 친일파들은 오히려 득세하게 되었고 독립 운동가들은 다시 음지로 들어갔다. 수십년 간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은 어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을 하느라 겪은 고초는 고사하고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조차 시키지 못해 후손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해방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독립운동가의 삶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제는 국민다수가 해방이후 세대라 치열했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무관심 할 수도 있다. 또한, 광복절을 단순히 공휴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결코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던 선조들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정부는 아직 발굴하지 못한 독립 운동가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일제에 강탈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삶을 바쳤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8·15 광복절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절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남은 친일역사 청산하고 또한 조국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독립 운동가들을 한분도 남김없이 발굴해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

 

독립 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꿈에도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이룬지가 어언 75년이 흘렀다.

 

아직 미완의 광복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 광복 75주년을 맞았다.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광복절의 참 의미를 이해하고 되새길 수 있기는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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