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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나누는 기쁨, 베푸는 보람’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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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2-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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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새로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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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다. 당시 경희대에서 검찰사무직 시험을 쳤다. 그런데 한 번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그리고 1973년 서울지검(현 중앙지검)으로 발령받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도저히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피의자에 대해 고함과 욕설, 구타가 다반사였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만두고 신학대로 다시 들어가기고 마음먹었다. 학교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편지를 써서 보내고 사표를 냈다.

 

그런데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그만두려한다고 과장은 호되게 나무랐다.

거기에다가 학교에서는 이미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어 동기들에 비해 많이 뒤쳐져있고 또한 좋은 직장을 얻었으니 그곳에서 선교활동에 힘써달라는 회신이 왔다.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결론은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에서 입장이 난처해졌다.

 

마침 국장이 부르더니 사건과로 발령을 냈다. 사건과는 경찰로부터 송치된 모든 사건에 대해 분류, 배치하는 부서로 대단히 일이 많은 부서였다.

 

연간에 수만 건의 사건이 밀려들어오다 보니 업무가 약 1년 치 정도가 밀려 쌓이는 때도 있었다.

 

상관이 밀린 업무를 부탁했다. 당시 결혼도 안한 상태고 집에 들어갈 일도 없어 토·일도 출근해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다보니 한 달 만에 모두 정리가 됐다. 그 소문이 청사에 퍼졌다.

 

입사한지 1년도 안된 상태서 사건접수를 맡게 됐다. 6~7년 정도 근무한 고참이 맡는 부서였다.

 

또한, 태생이 시골 촌놈이라 청탁같은 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청렴하다고 소문이 났다.

 

조금 지나고 나니 검사장실에서 비서로 오라고 연락이 왔다. 대검차장실에서도 나중에는 검찰국장실에서도 오라는 연락이 왔다. 결국 청와대까지 부름을 받았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뻔 했던 가난한 함안촌놈이 검찰에서 인정을 받으니 정말 열심히 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고향사람들

 

정구영 검찰총장 비서실장을 할 당시였다. 직급차이는 엄청났지만 친형제같이 잘 지냈다.

 

그러다보니 함안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부탁도 많이 왔다. 사실 고향 사람들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고향의 적지 않은 지인들로부터 부탁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하도 여럿이서 부탁을 하니 사건내용도 자세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당시 검찰총장과 검사장한테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

 

검사장이 알아보더니 작은 사건이 아니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번 건이 해결 안되면 고향 함안에는 가지도 못한다면서 꼭 살펴달라고 읍소했다.

 

결국 검찰총장과 검사장의 배려로 무사히 사건을 해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추석 무렵 함안을 내려갔는데 함안의 여러 친구, 후배들이 어쩌자고 그 사건을 봐줬냐면서 보낸 곱지 않은 시선을 한동안 감내해야 했다.

 

사실 사건내용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함안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화하고 부탁해 고향사람이라 신경을 썼는데 알고 보니 비난을 많이 받는 사건이었던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상당히 곤란을 겪었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등불다섯모임, 더불어 사는 사회의 태동

 

학교도 정리되고 지검에 있기로 한 뒤, 동료 5명과 우연히 자리를 마련해 식사를 하게 됐다. 다들 호남, 충청, 경상도 등 다들 시골에서 상경한 동료들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서로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했다.

 

모두 어려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가장 어렵게 자라왔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내 차례가 되었다.

 

당산동에는 전기불이 늦게 들어왔다. 앞 동네와 불과 약 100여 미터 차이지만 우리 집 쪽은 1년 더 늦게 들어왔다.

 

밤이 되면 우리 집은 호롱불이 유일한 빛이였다.

 

호롱불 밑에 공부하다보면 코밑은 언제나 그을음으로 가득했다. 촛불 아래서 공부해보는 것이 소박한 바람이었다. 호롱불에 비해 촛불은 훨씬 밝았다.

 

당시 보름이 되면 강가에서 촛불을 켜고 용왕님께 비는 작은 제를 지냈다. 기다렸다가 제를 지내던 사람들이 가고나면 달음질쳐서 주워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은 작지만 모이면 촛불하나는 될 것이라며 의기투합해 봉사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 등불다섯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취지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힘을 모아 보자는 것이었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연민이 앞섰던 것이다.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함께 나누면서 다 같이 잘 살자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의지만 있었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당시만 해도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감이 잘 안왔다. 그래서 영문학 교수인 지인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영어로 ‘For sharing common good society’라면서 ‘for sharing’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진정한 의미의 포 쉐어링은 단순이 나누는 것이 아닌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베풀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에 확 와 닿았다. 나눔의 집에 써놓은 나누는 기쁨, 베푸는 보람이라는 말을 그때 얻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성경에서 읽은 오메르(Omer)라는 말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되 두되 하는 되 이름이었다.

 

구약 출애굽기 1616~18절에 나오는 구절로 하나님께서 맛나(양식)를 주면서 각자 머리 수 대로 한 오메르(2L)씩 가져가라고 하자 더러는 더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더러는 덜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보면 더 가져간 사람도 넘치지 않고 덜 가져간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 모자라거나 남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많게 가져간 사람도 넘치지 않고 적게 가져간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그게 오메르가 의미하는 뜻이었다.

 

더불어 사는 사회,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뜻하는 아주 짧은 문구였다. 생각하니 더불어 사는 세상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좋은 말이 없었다.

 

신학대학을 그만두고 캠퍼스를 나올 때 사제가 못된다면 힘들게 살아왔던 만큼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겠노라고 하느님과 약속을 했다.

 

그는 오메르가 주는 의미를 가슴 속에 담아 삶의 지표로 삼았다.

 

나환자촌과 수녀님

 

검찰에 들어 간지 5년 뒤인 1978년 세밑에 등불다섯모임 회원들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오천리(현 의왕시) 모랍산 기슭에 위치한 성 나자로 마을을 방문하게 됐다. 나환자(한센병)촌이였다.

 

300여명의 한센병 가족들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중 80여명이 양성 환자였다. 당시 양성 환자들은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환자들이 반갑다고 손을 내밀자 일행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순간 나환자들과 입맞춤을 하며 편견없이 대 프란체스코 성인을 떠올리면서 저절로 그들의 손을 잡게 됐다.

 

세례를 받을 당시 프란체스코의 잔 꽃송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 그는 귀향 후 프란체스코 재속회(在俗會)에 들어가 그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서원(誓願)을 하고 평생회원이 되어 있었다.

 

그때 옆에 봉사자 두 분이 있었다. 화장기 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천사같이 보였다. 수녀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알고 보니 일본인 수녀였다.

 

그 봉사자 수녀님은 사람은 아무리 남을 이해한다해도 그들의 생각과 지극히 가까워 질수 있다는 것일 뿐 그 자신은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자로 마을에서 일하게 된 것을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은 제게 그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의 분신임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로 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도움이 되겠다며 쌀 몇 포대와 사과 몇 박스, 얼마의 현금 봉투 등을 들고 약간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찾아갔지만 수녀님 두 분의 헌신과 봉사의 삶을 보고 또 그 말씀을 들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스스로 남을 돕는 일이라며 하찮은 선행 하나로 우쭐거리면서 도움을 받는 상대를 업수이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수녀님의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나자로 마을의 방문은 오메르라는 삶의 철학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면서 구체화 되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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