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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나누는 기쁨, 베푸는 보람’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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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2-2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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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애인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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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흑석동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늦은 퇴근길에 앞에 가던 택시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뒤 따르던 나도 섰다.

 

택시기사에서 내린 기사는 감싸듯이 사람을 안고 택시에 태우려 했다. 직감적으로 교통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얼른 차에서 내려 그 택시 뒷좌석을 열고 승차를 도왔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교통사고가 아니라 승객은 하반신을 잘 쓰지 못하는 젊은 장애인이었다.

 

같이 안고 택시에 태우며 목발을 챙겼다. 그때 차에 타던 젊은이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냈고 택시기사 역시 감사의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뒷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 젊은이는 하소연을 하듯 택시를 타기 위해 무려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장애인이 세상에 던지는 절규였다.

 

그 젊은이는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택시를 타기 위해 한 시간 넘게 길에서 태워달라고 애타게 손짓을 했지만 당시 택시들은 외면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마침 마음씨 착한 택시기사가 발견하고 급하게 정차해 태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후 택시는 떠났고 한 시간 이상 택시를 타기위해 애타게 몸짓을 했을 젊은이를 보면서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장애인이 느꼈을 소외감 등이 피부로 다가왔다.

 

그동안 막연히 조금 불편하겠거니 하고 생각만 해오다 막상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을 직접 눈으로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동안의 정차로 등 뒤에서 요란한 경적소리와 고함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하지만 마음씨 좋은 택시기사를 보면서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 좋게 운전을 했다.

 

하지만 우연히 일어난 그날 일은 장애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귀향을 꿈꾸다

 

당시는 검찰의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근무도 했을 때라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골프도 그때 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늘 고향 함안으로 내려가야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듯 심한 향수병에 걸렸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라는 노래를 상당히 좋아했고 자주 부르기도 했다. 그 노래는 어느 듯 그의 18번이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나이 50이 되면 반드시 함안으로 내려가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금도 그 노래를 좋아하고 혼자 있을 때 자주 부르기도 한다. 무릎이 좋지 않아 목욕탕에 가면 수영장에서 걷기를 한다. 그때 늘 향수 노래 한 두 번 부른다고 했다.

 

199721, 귀향하다

 

199721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 함안으로 왔다. 서울에서 창원지검으로 발령받았다. 함안에 내려오자 문화의 거리에 더불어 사는 사회 연구소사무실을 열었다.

 

더사연은 함안에 내려오기 1년 전 서울에서 만든 상태였다. 막상 사무실을 열고 보니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 만남이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신종섭(90)씨였다.

 

당시 당장 거주할 곳이 없어 중앙약국 골목 안에 전세방을 얻어 두 분이 지내도록 했다.

 

하지만 식사가 문제였다. 늘 쌀과 반찬 등을 구비해 주었지만 스스로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보살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근본적 해결을 위해 작지만 복지시설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는 데마다 반대가 많아 쉽지 않았다. 혐오시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검암리 현 자택 앞 대지 151평을 기증해 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135, 235평 연면적 70평의 건물을 지어 나눔의 집을 만들었다. ‘더불어 사는 사회 연구소사무실도 같이 사용했다. 더사연의 목적사업 중 부설이 나눔의 집인 셈이다.

 

노인들 뿐 아니라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도 나눔의 집을 거쳐 갔다. 20여년을 운영하는 동안 계시던 분들 중에서는 나눔의 집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여럿 계시고 복지 시설로 옮겨 가신 분들도 계셨다.

 

20여 년 전과 달리 제도적으로 어른들을 모시는 국가복지 시스템들이 잘 정비되면서 나눔의 집은 원래의 기능을 조금씩 상실해갔다.

 

그러다보니 한분이 남았다. 바로 처음 만났던 신종섭씨였다. 하지만 그는 복지시설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모시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 쓰기에 큰 건물을 이용하는 것이 비효율적이었다. 논의 끝에 그분을 따로 모시기로 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연구소를 해산하기로 했다.

 

20여년을 운영하다보니 조영규 전 군수의 나이도 어느 듯 칠십 중반에 들어서게 되었다. 더불어사는 사회연구소를 해산하면서 그는 늘 생각해왔던 오메르 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로사의 집, 군수를 생각하다

 

박범숙 할머니가 사재 200억원을 천주교 재단에 기부해 범숙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에서는 여러 사업을 했다.

 

가야읍 말산리 중앙약국 조형규 약사가 범숙재단에 땅 15천평을 기증해 건립하려했던 로사의 집도 그 중 하나였다. 로사의 집은 2급 지적장애인 시설이었다.

 

96년부터 건립을 하려했지만 해당지역 주민들이 장애인 시설 건립을 반대해 함안군에서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

 

97년 함안에 내려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장애인 시설건립 반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로사의 집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행정심판을 제기하고 심사위원인 판사나 검사, 교수, 변호사 등 7명의 위원을 만나 설득했다. 결국 행정심판에서 이겨 함안군에 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함안군은 요지부동이었다.

 

화도 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군수가 되어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2007년 말 군수가 되었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공무원들에게는 바른 행정을 강조했다.

 

로사의 집 건립은 공약사업은 아니었지만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깨트리는 일이자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가는 일이었다.

 

결국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준공을 하게 됐다. 그는 준공식에서 군수 축사를 하면서 울컥하며 목이 메였다고 말했다.

 

구상과 실천

 

그는 군수가 되자 장기적인 함안 발전계획의 큰 그림을 그렸다. 먼저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함안군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검암산 산림문화 휴양림 조성 계획을 비롯 행정타운 조성계획, 하늘공원 조성계획, 악양 승마체험장, 이령·운곡 간 도로개설고시, 가야-법수간 6차선 도로확보, 39사 이전 당시 골프장 건립 등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그는 또, 악양 둑방 관광자원화 계획을 세우고 에코싱싱둑방 마라톤과 악양생태공원을 조성했으며, 연꽃단지 조성과 동지산 3층 휴게시설, 입곡 출렁다리, 공원묘지 조성 등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결국 26개월간의 짧은 임기로 마무리를 보지 못한 채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조영규 전 군수는 불과 26개월로 임기를 마치면서 당초 구상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현 낡은 군 청사를 이전해 신축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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