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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연현 친일 문제에 대한 재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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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9-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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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 친일 문제에 대한 재 반론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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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일(아라가야향토사 연구회 부회장)

 

조평래(함안문인협회)회장이 조연현이 친일했다는 나의 주장에 재 반론하므로 그에 답한다. 성의껏 답변해주어서 고맙다.


 지난 호의 글을 읽어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나는 20년 전의 주장을 반복해서 하는 느낌이지만 상대가 나의 답변을 요구하므로 다시 전과 같거나 비슷한 주장을 하더라도 독자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1.논지를 정확히 하자.


나의 주장은 공공의 장소에서 나랏돈을 들여서 그런 흠결이 있는 사람을 기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논쟁을 하자면 논지에 충실해야 하는데 조회장의 글은 자주 이 논지에서 벗어나 있다. 오류가 많다.


 조연현은 글을 통하여 매우 심각한 친일 행위를 하였으므로 공공의 장소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여서는 안 된다. 공원이 휴식공간일 뿐만 아니라 전시 작품을 즐기는 교양과 국민 교육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하여 시판(詩板)을 설치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자리에서 논증해야 할 것은 그가 친일부역을 하였느냐, 했으면 어느 정도로 하였느냐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2. 그의 글은 심각한 친일부역이다.


‘아시아 부흥론 서설’은 입에 담기가 부끄러운 글이다. 이 글은 친일 잡지 동양지광(1942년 6월호)에 실린 글인데 「‘동양지광’의 현상공모 지상(誌上) 결전 학생웅변대회에서 3등으로 뽑힌 작품이다.


이 때 그는 23살인 혜화전문학교 학생 신분으로 기고하였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이 글의 내용을 보자.

 ‘여기서 또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인 아세아 중심은 일본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중략) ... 일본 민족의 정신적 순결을 끝까지 옹호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적당한 방법으로 주위의 친근 민족을 점차적, 자발적으로 일본 정신에 동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그들에게 우리의 민족적 동포로 참여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사이토 씨가 <전후의 사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동아공영권을 가능케 할 수도 있고, 아시아도 ‘하나다’라는 이상도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국의 청년학도제군! 자각과 복수의 마음으로 불타며 아시아 공영권의 건설에 매진합시다. 아세아 부흥의 새벽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온 세계의 경탄과 공포 가운데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전국의 청년학도제군이 자각과 복수의 마음으로 불타서 아시아 공영권의 건설에 어떻게 매진하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여 죽으라는 말인가?


 이렇게 주장해 놓고 자신은 살기 위하여 절(寺)로 도망다니고 함안면 서기를(조평래회장 글) 하였단 말인가?


 ’이 글이 5 인 가족이 공출로 바친 관솔 기름 한 말보다 더 큰 도움을 일본제국에 주었을까 ?‘(조평래회장 글)라고 말하면 되는 것인가?


 그는 그 때 대학생이었고 23세였다. 요새 보면 어린 나이다. 그러나 그 때의 대학생은 그 사회의 지식인이었다. 23세는 어른이었다.


당시에 군북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9~15세 학생들도 조정제, 조명제를 필두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동맹휴업 시위를 하였다.(1932년 2월 29일).


3.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었구나.


 조연현은 단행본 33권, 기타 400편 이상의 글을 <조연현 문학전집 6권>으로 남겼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책인 ’한국현대문학사‘에서도 자신의 친일부역한 일을 거론하지도 않았고 그 외 다른 책에서도 친일 색채가 있는 그의 글들을 한 편도 싣지 않았다.


 너무 젊은 날에 쓴 글이라서 가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서 감추고 싶었기 때문일까?


 이 현대문학사에는 1910년대부터 해방 이후 20년까지의 문학사를 10년 단위로 나누어서 기술하고 있다.


그 시대의 문예지, 문단의 특성과 그 시기에 활동한 작가와 작품들까지 나열하고 있으나 1940년대에는 문단의 암흑기라고 명명하고 시대의 중요한 사조로 자연주의와 전통에 경도된 특성을 보였다고만 기술한다.


이 시기에 조연현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변절한 작가들과 일본어로 된 친일부역 작품은 다루지 않고 있다.


이 책의 증보판은 1969년에 나왔다. 왜 그랬을까? 변절 작품의 양산이 그 시대의 가장 큰 특성일 텐데.


 그런데 젊은 날의 작품인 ’진달래꽃‘은 그의 작품집에 실려 오늘날 시판으로 전시되고 있다.


4. 조연현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4번이나 하였다.


 조평래 회장은 그 과정에서 그의 친일부역 행위가 불거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신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는 칠일 행위를 대놓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예로써 다음 글을 제시한다.
 
“문화예술계에서 친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있었는데 그 행적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임종국이 1966년에 <친일문학론>을 펴내지 않았더라면 문인들의 친일 행각은 다 묻혀버렸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임종국의 부친이 친일 부역자였다는 것이다.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수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침략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행적이 있었다. 임종국은 집필 중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죽은 책이다”라고 하여 아버지 임문호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반성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대속(代贖: 대신 속죄함)해주어 기뻤던 것이다. 하지만 책에 학계와 문단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 덮은 일을 왜 들추느냐는 분위기여서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초판 1500부가 13년 동안 나갔는데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구입해 간 것이었다.” (한겨레신문. 2021.8.5. 이승하 중앙대교수.)


  당시 정부 요직 대부분을 친일 과거가 있는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해방되자마자 미군 군정은 친일 인사를 그대로 기용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그러했다.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은 친일반민족특별위원회를 해체시켜 버렸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친일잔재를 청산할 하늘이 준 기회를 잃어버렸다.


 당시에 한국문인협회는 한국문인들의 대표격이었다. 그 수장인 그가 단 한 번도 그의 젊은 날의 친일 글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은 것이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면 문학은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영역이 아닌가?


 ’한국 사회는 글과 문필가들을 존대하는 전통이 있다. 글 때문에 문인들이 대체로 존숭(尊崇) 받는다면 이에 대한 책임도 엄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홍기삼 선생은 역사가 이미 화석화되어서 포용하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견해가 다르다.


“한국의 대통령이 2011년 12월 17일 현재 일본을 방문 중인데, 정신대- 위안부문제를 중요한 외교문제로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1.12.22. 함안뉴스. 필자 기고문 인용)


 프랑스의 드골은 2차대전이 끝나고 히틀러에 부역한 프랑스인 일만 명을 처형했다. 그 중에서 글하는 사람과 언론인들을 가장 엄중히 다루었다.


 왜 그랬을까? 글의 사회적 책임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5. 조평래 회장은 조연현의 두 편의 글에서는 미국과 영국문화를 비판하였다고 친일파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큰일 날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런 견해가 함안문인회협 회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


부디 함안문인협회의 입장과는 무관하기를 바란다.  두 편의 글이란 어느 글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으로 보아서 「동양에의 향수」를 포함하는 말인 모양인데 그러면 다음 글을 보자.


‘「동양에의 향수」(「동양지광」 1942년 5월호)에서 현대인은 서양 문화의 의장 속에 살고 있지만 ... (중략)... 동양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략)... 이성의 절대적 권위를 버리고 동양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일본 낭만파’가 있듯이 ‘대동아 낭만파’를 만들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절대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일본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작동한다.’(「그대여 조용히 생각해 보라」 「동양지광」 1942년 5월호).

(친일인명사전)

 

그는 신념의 비평가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올 한 해 평단의 부진이 우선 비평가(비평뿐만 아니라 작가도 포함해서)의 국민문학에 대한 신념의 불철저에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다.”
(「평단의 일년」 (「신시대」 1943년 12월호)


 이 때의 ‘국민문학’이란 것은 대동아공영을 목적으로 하고 이의 실천적 자세는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다. 이것이 단순히 서양 문화를 비판한 것인가?


6.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한다.


다음 인용 글로 내 주장을 대신한다.


“태평양전쟁 전과 전시에 나온 <대동아> <총동원> <국민총력> <녹기>가 다 우리 조상이 만든 친일 잡지다. 평론가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국민문학>으로 바꿔 일본어로 펴냈다. 이 잡지의 목차를 보니 당시의 유명 문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들 중 광복 이후에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은 지금 모든 고등학생에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보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8·15 광복절을 맞도록 하자.”
(한겨레신문. 2021.8.5. 이승하 중앙대교수.)


7. 조평래 회장은 내 글을 잘못 읽고 반박한다.


가.


조평래 회장 주장 : 가족까지 끌고 와 상처를 주면서 사과해야 한다는 말은 논리상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다.


필자 : 전혀 사실무근. 오히려 나는 다음 말을 하였다.


‘이런 행사에 그의 유족을 불러서 와서 친일 문제에 대한 발언을 듣게 하는 것은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1.12.22. 함안뉴스. 필자 기고문 인용)
 
나.

조평래 회장 주장 : 문학상과 백일장을 말하면서 이태준, 정구 등을 나열하였는데, 이 분들이 한글로 문학작품을 남긴 문학가들인지 묻고 싶다.


필자 : 이는 함안문협이 20년 동안 ’조연현‘에 묶여 있으니 이를 털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예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의령문인협회의 주창으로 ‘천강문학상’<天降은 곽재우 장군의 호> 을 제정하여 의령군이 운영하고 있듯이 가령 ‘이태준 열사 기념 백일장’,이나 ‘정한강 문학상’<寒岡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지인 함주지를 저술한 정구의 호> 제정 등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호 필자 기고문)


다.

조평래 회장 : 경남도친일잔재청산 조례는 조연현에게 적용 될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 : 경남도친일잔재청산 조례 2조 1호 19항에 문화예술 부분의 반민족행위자를 다음으로 정의한다.

 19) 문학ㆍ미술ㆍ음악ㆍ무용ㆍ연극ㆍ영화 등 문화예술 부문에서 창작과 공연 활동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하고 선전ㆍ선동한 자.

 조연현은 왜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라.

조평래 회장 : 춘천 사람들이 뭘 안다고 조연현 시비를 땅에 묻고 운운...
   
필자 : 그 사업은 춘천문인협회와 춘천시가 한 사업이다.


마.

조평래 회장 : 창씨개명 운운.

  

필자 : 나는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의 문제로 삼은 적이 없다. 조 회장이 윤동주의 창씨개명을 언급하므로 윤동주의 경우를 말한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려면 일제경찰로부터 도항증명서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자면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윤동주의 경우 1942년 1월 29일 윤소동주(尹沼東柱, 히라뉴마 도오쥬우)라고 개명했다. 개명하기 직전인 1942년 1월 24일 다음 시를 썼다.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전문>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뺏기니 이름을 뺏기고, 몸도 뺏기고. 혼까지도 빼앗겼다. 역사도 빼앗겼다.

중국 황토고원에서, 북간도에서, 러시아의 자유시에서, 연해주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나이 어린 독립운동가들이 수없이 많다.


8. 이 글의 제목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이 말씀에 빗대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을 알았으면 반성하여 고칠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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