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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0-0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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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조연현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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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문인협회 회장 조평래
 


1. 들머리


신문사 4곳, 라디오 방송, TV방송을 통해 한 친일의 주장과 글을 모두 파악하기 어려웠고 어디까지 기자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이순일선생의 생각인지 혼란스러웠다.


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요약하여 글을 발표했으며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를 하지 않고 더 많은 성과를 얻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토론은 싸워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와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인데, 출발부터 달랐던 것 같다.


이순일 선생도 이순이 넘었으며 적은 연륜이 아닌데, 아직 기백이 남아 있어 존경을 보내지만, 역사 인식과 인물을 평가함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2. 역사인식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를 비참하게 살다가 간 사람들보다 이런 시대를 만든 앞 세대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라면 구한말의 썩은 유학자와 지식인들, 나라의 등골을 파먹은 안동김씨, 여흥민씨, 풍양조씨의 외척세력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 때 민족 반역자들을 용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조연현은 망한 나라에서 태어나 일제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등학교 시절 두 번의 퇴학과, 대학에서도 또 퇴학당한 후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된다.


면서기를 10개월 가까이 하면서 조연현은 1945년 8월 광복이 될 때까지 경찰의 정규적인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연현문학전집》 1권 148쪽에 의하면  “......불전(혜화전문, 동국대 전신)에서 학생사건에 연좌되어 퇴교 당했기 때문에 경찰에 요시찰 대상으로 되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규적인 조사를 해가곤 했다......”라 하고 있다.


늘 경찰의 감시를 당한다는 게 얼마나 심리적으로 피곤한 일인가. 도피생활을 하면서 요시찰을 피하고 면서기가 되기 위한 위장용 글이라 해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국외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아세아부흥론이나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그 자체만으로 용서할 수 없는 친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세대는 일제 때 살지 않아 일제 때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군처럼 친일이라는 용어에 자유롭다.


얼마든지 더 가혹하게 비판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이 땅을 지키며 산 사람들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못 했고, 지옥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생계형 친일행위를 피할 수 없었다고 본다.


옥에 티와 같은 과실이 있다면 밝혀두고 대범하게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아세아부흥론


친일문학을 연구한 김병걸․ 김규동이 석재 조연현이 22~3세 때 쓴 〈자기의 문제로부터〉,〈아세아부흥론 서설〉,〈문학자의 입장〉이 문제가 된다고 《친일문학 작품선집 2》에 실었고,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앞의 글 논조를 문제 삼았다.


조연현은 앞에서 말한 3개의 글에서 일관되게 언급한 게 일본의 사상가이며 미학자 오까꾸라(岡倉天心, 1863~1913)가 주장한 ‘아세아는 하나다’라는 말을 소개하고 영국과 미국의 아세아침략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아세아부흥론 서설〉에서 일본이 아세아를 각성시키고 중심이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 아세아 민족의 문화를 일본화시키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연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아세아는 ‘하나’가 된다고 말해 봐도 이제까지 생활감정이나 국가 이상이 서로 달라졌던 아세아의 각 민족을 일본화한다는 일도 실제적인 문제로서 불가능한 것이다...   아세아라고 하는 각양각색의 소민족(小民族)들이 저 마다의 개성으로 각자 고유한 생활을 하면서, 상호 조화적으로 특수한 국가군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더듬도록 촉진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아세아 침략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학생 나이의 청년이 일본 학자의 주장을 소개하고 영국과 미국을 비판하면서 싸워야 한다고 해서 민족반역자와 동일시 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여유가 없는가.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친구들과 대화 속에 칼 마르크스를 언급하다 경찰이 알면 바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고, 《자본론》이라는 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꼼짝 못하고 공산주의로 몰리던 때가 있었다.


혹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욕하고 비판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대동아공영의 끈에 우리가 묶여 있지는 않는지, 우리가 우리를 묶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야당이 악전고투 끝에 여당이 되면 야당시절 한 말로 곤욕을 치루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일제의 노예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넘어가지만, 우리의 무의식과 문화가 아직 식민지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아세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2차 대전 때 일본이 아세아 여러 나라에 너무나 많은 악행과 상처를 남겨 그들은 대동아공영 혹은 아세아연합이란 말을 함부로 꺼내지를 못하지만, 일본보다 자유로운 우리는 앞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4. 순수문학에 대한 오해


조연현은 김동리와 함께 순수문학의 상징이 되어 생존 때 이미 많은 적을 가지고 있었다. 조연현이 곤욕을 치루는 것은 외형적으로 친일이지만, 내면적으로 순수문학을 옹호한 영향도 있다고 본다.


순수문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평소 정치나 경제에 거리를 두고 외세가 침략하거나 독재정권이 들어서도 저항하거나 견제역할을 하기보다 순수를 빙자하여 현실을 외면하거나 순응한다고 보았고, 국내 문인들 중에 실재로 그렇게 비겁하게 산 문인들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조연현은 현실참여를 문학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문학을 좁은 울타리 속에 한정시키는 위험이 많다고 보았고, 현실은 정치적 제도 경제적 구조로만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변혁이나 경제적 구조의 변화가 생기면 아무 쓸모없는 문학보다 그 가치가 영속되는 문학을 소중히 해야 한다며 문인이나 문학이 정치나 경제에 예속되기보다 도도하게 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적극적 현실 참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순수문학은 공적이나 마찬가지였다.


1963년 조연현이 주간으로 있던 《현대문학》 10월호에 조연현의 문학이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김병걸의 <순수와의 결별>이란 원고가 들어오자 흔쾌히 그대로 게재했고, 김병걸과 김규동은 조연현 작고 후 《친일문학 작품선집2》에 조연현이 22~3세 전후로 쓴 글을 찾아 친일문학에 포함시켜 친일논쟁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떨어진 생각이라 비웃을지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 우정도 사랑도 문학도 돈이나 권력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순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광복 후 우리의 선배 문인들

은 ‘순수냐 참여’로 나누어져 많은 논쟁을 했는데, 이런 이념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물러 받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5. 고향 문인들과 교류


조연현은 함안 문인들의 구심점에 있었다. 선배에 양우정, 문우로 조진대, 강학중 등이 있었고, 그 중에 서로 각별하게 존중하고 아꼈던 후배문인으로 이석 시인과 문덕수 시인이 있었다.


군북면 모로 출신 이석(1927~2001) 시인은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고 전신), 마산상고, 서울 경기여고 국어교사를 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마산문협 초대 회장․ 부산문협 회장을 역임하면서 지역문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으며 조연현과도 생전에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강원도 속초에서 강연회 후 고향 후배들과 함께. 왼쪽에서 첫 번째 군북면 모로 출신 이석, 두 번째 조연현, 세 번째 법수면 우거 출신 문덕수.

법수면 우거 출신 문덕수(1928~2020) 시인은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과 국제펜한국본부 이사장을 엮임 했으며 대학 문학교재와 많은 시집을 남겼고, 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며 가장 권위 있는 월간지로 통하던 《시문학》을 주간하기도 했다. 2020년 3월 13일 심산 문덕수가 작고하자 대한민국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문덕수는 2001년 조연현문학관이 친일논쟁으로 무산되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가장 애석하게 여겼던 문인 중 한 사람으로 조연현을 친일로 볼 수 없다는 글을 남기도 했다.


6. 마무리


올 여름 시판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기획하고 설치에 관여했던 담당공무원은 이미 다른 부서로 직책이 바꿨고, 새로운 사람이 업무를 맡았다. 새로 온 공무원은 영문도 모르고 양측에 끼여 마음고생이 많이 했음을 안다.


함안문협 이사회에서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다. 조연현의 시 ‘진달래’는 일제 때 함안사람들이 겪은 수탈과 흉년으로 배고픔과 식민지 청년의 우울함을 잘 표현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시이지만, 이 시로 인해 공무원이 업무를 못 볼 지경이 되고 함안군민의 단합을 해친다면 굳이 그 자리에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철거하기로 한다. 석재 조연현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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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에서 강연회 후 고향 후배들과 함께. 왼쪽에서 첫 번째 군북면 모로 출신 이석, 두 번째 조연현, 세 번째 법수면 우거 출신 문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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