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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김언수(金彦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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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1-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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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김언수(金彦秀) 장군

 

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모아 삼봉산에서 왜적과 싸우며 크게 전공 세워

 

전투 중 부하·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 장군에 대한 기록 적어 재조명 필요

 

가야읍 묘동에 선생 묘소 위치, 후손들 가야읍 묘동 삼봉재에서 매년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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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金彦秀)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가야읍에 있는 삼봉산(三峰山)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공을 세웠고 이듬해 성주에서 왜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김언수 장군은 자가 수부(秀夫), 호가 귀헌(龜軒)으로 만력 무자년(1588) 무과에 급제했다. 임란 후 선무원종이등공신으로 기록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생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찬한 <귀헌실기>가 있다하나 현재 함안에서는 찾을 수 없고 조선말의 성리학자인 錦谷(금곡) 송래희(宋來熙)선생이 찬한 묘표(墓表) 역시 자료를 구할 수 없다.

 

다행히 김언수 선생을 배향하는 함안군 가야읍 묘동의 삼봉재(三峯齋) 기문(記文)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이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가동(家僮, 집안의 종)과 마을 장정들을 지휘해 최초의 방어진지를 구축함에 있어 삼봉산을 배경으로 횃불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북소리로 땅을 진동시키니 적이 그 위력이 막강한 것으로 착각하고 감히 경계 내에 접근치 못하더라.

 

이같이 수개월을 버티니 세력이 중과부족이라 공이 승전이 어렵다고 판단, 곽재우 장군에게 청해 수백 명의 군병을 지원받아 파산 방어진지에서 왜적을 공격해 적병 상당수를 살상하고 생포해 큰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계사년(1593) 여름 성주, 흥주 등의 목사 등과 합동공격으로 수백의 왜병을 살상해 두 번째 전공을 세우셨다.

 

장군은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수십여 곳이었는데 두 목사와 같이 전사하시고 공의 부하 의병들도 모두 전사했다.

 

전쟁 중에 집안 하인인 백종(白種)이 살아남아 왜병이 물러간 뒤 공의 시신을 등에 업고 고향에 돌아와 장사지냈다. 이 사실과 공적 등은 삼봉일기와 선무원종공훈록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삼봉산 2봉에서 3봉으로 가는 길목에 후손들이 조성한 듯한 김언수 장군 임란전투 유적지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김언수 장군은 김해김씨 삼현파의 11세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안 삼봉산에 성을 쌓고 모곡(茅谷) 산중에서 왜적에 대항하며 수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성주(星州)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김언수 선생의 묘소는 가야읍 묘동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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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선생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 오며 명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김수로왕의 제12대손인 김유신 장군의 직계로 고려시대 김목경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로 이어진다.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던 삼현파 일대조 김관(金管)5세손인 김극일(金克一)은 조선초기의 거유(巨儒)로 야은(冶隱) 길제(吉再)에게 학문을 배웠다.

 

아들 김맹(金孟)과 손자인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 등은 김극일에게 학문을 배워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특히, 손자 3형제는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 삼주(金氏三珠)로 불렸다.

 

하지만 김준손의 동생인 김일손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면서 집안은 크게 변을 당하게 된다.

 

무오사화는 1498(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훈구파의 비행을 소상히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한 내용)을 기록한 사초(史草)가 유출되면서 발단이 된 사화(士禍)로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사초를 없애(세초, 洗草) 실록의 내용을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정치적 참극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때 김준손과 그의 아들인 김대유(金大有)도 숙부인 김일손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집안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김종직, 김일손 등이 보여준 사림파의 정신은 나중에 조광조에게로 이어지게 되나 이마저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훈구파에게 희생당하고 만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던 김일손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도 기억하게 했다.

 

김대유는 숙부 김일손의 유고를 모아 판각하고 연보를 편집하는 등 존경하는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김대유의 학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로 이어져 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정신은 김대유의 동생 김대아와 아들 김익, 손자 김치문을 거쳐 증손자 김언수(金彦秀) 선생에게로 이어졌다.

 

김언수 선생이 왜적에 끝까지 대항한 것은 곧음에 있어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던 선조 김일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곧은 정신은 한 치의 망설이도 없이 왜적과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목숨을 바쳤다.

 

군북 사촌의 사림재는 김일손의 현손으로 처음 터를 잡은 김연직 선생을 배향하고 있으며, 가야 혈곡의 암운재는 김준손의 손자인 백암공을 배향하고 있다.

 

또한, 가야읍 묘동의 삼봉재에서도 후손들이 매년 김언수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하지만 왜적과 맞서 큰 전공을 세우다 장렬히 전사했음에도 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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