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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歷史의 香氣>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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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9-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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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1968)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c0cfb0fdc6edc1fd_c1a6b8f1_bef8c0bd.jpg 혁명이 없는 시대에 혁명가의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 들여지는가?
이런 질문은 민족해방 투쟁의 탁월한 전사이자 인간에 대한 깊은 경외와 애정으로 가득 찬 체게바라의 경우가 되면 더욱 절박해진다.

장 폴 샤르트르의 말처럼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평가되는 체게바라는 위대한 혁명가이자 가슴 속에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뜨거운 애정으로 가득차 있는 휴머니스트이며 詩人이자 의사였다.

그는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왜냐하면 억압은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땅의 억압과 부조리와 투쟁하고자 했던 그는 총을 든 그리스도라 불리웠다.

체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진보적이며 유능한 건축가인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귀족 가문의 프랑스 문학 애호가인 어머니 셀리나 데라 세르나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을 딴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였다.

2살 때, 어머니와 강가에 수영을 하러갔다 심하게 앓은 후 걸린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힌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무척 좋아해서 럭비부에서도 활동을 많이 했으며 그는 곧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대학 때 자원봉사로 나병 환자촌에서 생활하였으며, 선배인 알베르토와 그들의 애마인 낡은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남미 전역을 여행하면서 억압 받는 남미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이때의 일들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들을 치료하지 않는 한 어떠한 해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1953년 7월 25세이던 에르네스토는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아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여행과정 속에서 스스로와 약속했던 새로운 인생을 위한 두 번째 여행을 떠난다.

남미 전역을 여행하던 그의 눈에는 민중의 삶이란 것이 비참함 그대로였고 또한 1954년 민중을 위한 개혁을 단행했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대통령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용병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아르벤스 편에서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결국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되고 곧 멕시코로 탈출하게 되는데 1955년 7월9일 밤, 그는 아바나대학 법대출신의 변호사이자 혁명가였던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Che라는 별명을 얻어 체게바라로 불리워졌다.

그 후 그는 카스트로의 유격 훈련에 동참하게 되고 그가 28살 카스트로가 30살 때이던 1956년11월25일 그란마호를 타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 바티스타를 타도하기 위해 쿠바로 떠난다.

그러나 12월2일 쿠바 동부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바티스타 친위대의 공격을 받아 82명중 12명만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으로 도피하여 게릴라전을 펼쳐 불멸의 신화를 만든다.

그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연구를 좋아했고 또 훌륭한 의사이자 학자였다. 그러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그였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뜨거운 애정으로 그는 결국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독서광이었던 그는 전투 중 잠시의 쉬는 시간에도, 또한 모두가 피곤에 지쳐 잠에 골아 떨어진 시간에도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는 늘 시를 암송하였고 괴테를 특히 좋아했다.

체게바라의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단 2년 만에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물리치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다.

그는 혁명 정부에서 상업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맡았으나 옷장에는 낡은 올리버색 군복 몇 벌 밖에 없었다. 그리고 늘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으며 똑같이 노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아프리카 콩고로 남미의 볼리비아로 인간 해방과 혁명을 위해 게릴라가 되어 다시 험난한 길을 떠난다.

그리고 1968년 그가 그토록 해방 시키고자 했던 남미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된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현재의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체게바라에 열광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무한한 애정을 간직 채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또한 올곧은 신념과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 순수하고도 순교자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온 그는 전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체 게바라의 삶은 분명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한 그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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