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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함안 항일 독립운동사 (咸安 抗日 獨立運動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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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10-0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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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의거는 일제에 저항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여 삼남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가 발생했다. 또한 일본 군경의 피해도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군북의거를 재현하고 있는 군북면민들)
 
-공약삼장(公約三章)을 무시한 공격적인 함안읍 및 군북의거-
 
함안읍의거는 폭력시위로 시작하여, 폭력시위로 매듭지었고, 다음날 군북 장날의거에서도 5천 군중은 군북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지면서 어제 함안읍의거로 구속된 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폭력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함안읍의거와 군북의거는 공약삼장(公約三章, 註1)에 명시된 평화적 시위를 철저히 무시한 공격적 시위이다.
전국에서 바생한 폭력시위는 대부분 군경의 강압적 과잉진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나, 함안읍. 군북의거는 애초부터 폭력시위가 계획된 것이다.
『 ▶ 註1. 공약삼장(公約三章)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 인도 . 생존 .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대종교 신도들의 주장에 따른 함안읍 의거-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을 숭모하고 민족정기를 보존하기 위한 종교이다.
고유한 원시신앙을 체계화 한 것으로, 대종(大倧)이란 삼신(三神)일체(一體)의 천신(天神)을 받드는 신앙이고 삼신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단군)으로 민중과 유림에도 거부감없이 잘 융화되었으며 서일 김좌진 이범석장군 등과 같은 항일 무장 단체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함안읍 의거의 산실인 동명학교(東明學校)는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유학하고 대종교를 신봉하는 이연건(李鍊乾)지사가 산파역을 하여 세워진 학교이고 대종교의 교리에 따라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과 민족의 우수성과 정통성을 널리 계도하였다.
학교에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참배하면서 민족혼을 일깨웠다.
이 터를 후일 ‘단군 한배 터’라 하였다.
동명학교 교사진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지사와 같이 만주에서 대종교 교적간행(敎籍刊行)업무를 맡은 이연건 지사,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 동양대학교(東洋大學校) 영문과를 나와 월간잡지 신소년을 편집하고 중앙인서관(中央印書館)을 설립하여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 주시경선생 유고 등 민족도서를 발간하고 대종교에 대한 교리나 간행물을 만들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안희제,이연건을 도운 이중건(李重乾)지사, 대종교 교조(敎祖) 나철(羅喆)의 여섯 제자 중 한사람으로 교조 나철이 1916년 구월산에서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고 단군의 자손은 궐기하여야한다는 유서를 쓰고 자결할 때 유명(遺命)과 유서(遺書)를 봉승한 안영중(安英中)지사,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함안읍 의거에서 실질적 지도자요, 행동대장으로 궐석재판에서 징역6년을 선고받은 이희석(李熙錫) 지사, 중앙학교를 나와 1916년 친일 부호 민영휘에게 대종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독립자금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함안의거에 참여하고 1924년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징역 7년을 언도받은 박종식(朴綜植) 지사, 상해임시정부 강원도 대표로 활동하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박건병(朴鍵秉)지사, 함안읍 의거를 주동하여 징역3년 형을 언도받은 안재형(安在瑩)지사 등 모두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대종교를 신봉하는 동명학교 교사들은 무저항, 비폭력 ,평화적 시위로는 조국의 광복을 기약할 수 없으니,  삼신일체의 천신(天神)에게 조국독립을 기원하는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주장하는 반면에 일본인 경찰관에게 독립선언 만세운동의 사실증명서를 받아 만국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독립을 청원하고, 친일세력을 대표하는 민인호 (閔隣鎬)함안군수를 규탄하여 친일주구세력에게 경종을 울리고, 침략의 하수기관을 철저히 파괴하여 그 기능을 마비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성공하였다.
함안읍의거를 계획하고 주동한 이연건, 이중건, 이희석, 안영중, 박종식 지사는 서울로, 박건병 지사는 강원도 철원 고향으로 피신하였고 안재형 지사만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에서 천지신명에게 고천제를 지내고, 독립선언식을 마친후 바로 경찰관 주재소와 우체국을 습격하여 치안과 통신을 마비시키고 침략의 하수기관을 철저히 파괴하고 고을 원인 군수를 앞장세워 만세를 부르게 했으며 일본인 경찰서장과 순사부증을 협박하여 구타하여 독립운동의 사실증명을 강요한 의거는 함안읍의거가 유일하였다.
이러한 함안의거는 대종교를 신봉하는 항일 무장단체의 영향을 받은 동명학교 교사들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순국자 삼남지방 1위, 일본 군.경 피해 전국 1위인 군북의거-
 
함안장날에 고을원님인 함안군수가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나라를 잃고 탄압을 받던 함안군민은 군북장에서 5천명이나 모였다.
군북 냇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엄숙히 거행하고 돌멩이와 태극기를 손에 쥐고 군북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어제 함안읍 의거에서 구속한 애국지사를 석방하라는 구호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포위망을 압축하자 혼비백산한 진해 경중포병대대 군인과 경찰은 공포(空砲)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의거군중의 기세가 꺽이지 않자 드디어 주동자를 정조준하여 발포하였다.
당시 조선군 1군 사령관 우모미야따로(宇野宮太郞)가 1919년 3월29일 자로 일본의 육군대신 다나까 요시이찌(田中義一)에게 제출한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3월20일 군북면 덕대리 남단 동촌리 신창사숙(新昌私塾)에 약 3천명의 폭민이 군집하여 독립만세를 하므로 군북경찰관 주재소에 파견한 진해만 경중포병대 특무조장 이하 16명을 경찰의 요구에 의해 출동시켜 해산시켰다.
그러나 폭민이 다시 군집하여 왔다.
주기(酒氣)를 띤 조선인이 심히 떠들므로 그를 끌어내었는데 주기로 넘어져서 손가락 끝에 상처를 입자 분연히 일어나 그 졸병의 군모를 탈취하고 격투하려 했다.
또 다른 광폭한 조선인이 특무조장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하므로 손을 뿌리쳤더니 이로 인하여 조장의 상의가 찢어졌다.
이와 같이 군중의 태도가 점점 난폭해지므로 4~5명의 병사로 하여금 공포를 발사시켰더니 그 부근에 있는 자는 해산하였으나 그것이 공포라는 것을 알고 조선인은 다시 재거(再擧: 두 번째로 벌임)하여 약4천명의 군중이 몰려와서 투석을 하여 유리창과 벽을 상하게 하는 등 폭위(暴威:거칠고 사나운 위세)를 심하게 하였다.
따라서 재차 공포를 발사하였으나 이를 경모(經侮: 업신여기거나 모욕함)하고 더욱 폭행의 도를 높여 폭민의 투석으로 부상하는 병졸이 생기므로 부득이 실탄 사격을 개시하고 근접하여 폭행하는 자는 총검을 휘둘러 이들을 찔렀다.
그리하여 폭민은 군중 가운데서 쓰러지는 자를 보자 여기에 놀라 해산하였다.
시위를 진압한 결과, 조선인 사망자 남 20명.여1명, 부상자 조선인 남 17명.여1명,  일본군대, 일본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 민간인 사망자 1명은 군북 시가지에서 잡화상을 하면서 일본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며 방자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였다.
일본경찰의 잔인무도한 조준사격으로 애국지사 40여 명이 사상되었으니 격분한 군중은 일본민간인을 몰매로 때려죽였다.
1919년 9월 29일 조선군 사령관 우모미야따로(宇野宮太郞)가 육군대신 다나까 요시이찌(田中義一)에게 3.1운동 발생 후 군대가 출동하여 사상사를 낸 것에 한하여 종합하여 일람표를 만들어 보고하였다.
3.1운동당시 군대가 출동하여 피아(彼我)간에 사상자가 생긴 시위는 전국에서 95건이고 그중에 15명이상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평남 맹산에서 54명이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비롯 경기 제암에서 29명, 평북정주에서 28명, 평남 선천에서 25명, 경남 함안 군북에서 21명, 충남 병천에서 18명, 평남 영원에서 15명, 경북안동에서 15명 등이다.
삼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함안 군북은 21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5번째이자 남한에서는 경기도 제암 다음으로 사망자가 많았다.
일본군대의 부상도 전국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치열했다.
군북의거에서 희생자가 많고 3.1운동 이후에 악형과 탄압이 혹독하여 “궁뒤(군북)장에 영(令)도 모르고 갔다”라는 말이 항간에 생겼다.
 
-남.북당이 대립한 함안민란(咸安民亂)의 영향을 받은 의거-
 
함안읍과 군북 의거에서 시위군중은 3천명과 5천명으로 3.1운동 전기에 일어난 의거로는 그 규모면에서 엄청나고 전국의 폭력 시위는 대부분 일본 군경의 과잉진압에서 발생하였으나 함안읍과 군북의거는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바로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마치 예행연습을 한 것 같이 일사분란 하였다.
이러한 함안읍과 군북의거는 함안민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함안민란은 현지 세력이 남과 북으로 대립하여 향회(鄕會)의 향권(鄕權)을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9세기 말, 함안향회는 이향(吏鄕)의 추천권, 부세(賦稅)의 운영권과 포흠(逋欠:관청의 물품을 사사로이 써버림)으로 인한 재정결손 문제를 도결(都結: 조선 후기에, 고을의 구실아치들이 공전(公錢)이나 군포를 사사로이 사용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하여진 금액 이상으로 물리던 일.)하는 일, 각종 잡비를 배징(倍徵: 정한 액수의 두 배를 거두어들임)하고 승인하는 일, 각종 공납의 독촉과 수납 문제 등에 관여하였다”
이러한 향회의 막강한 향권은 “북당(北黨)의 조윤수를 중심한 세력들이 가지고 있었으나, 오횡묵 군수가 부임한 이후에는 남당(南黨)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4년간 근무한 오횡묵 군수가 고성부사로 이동한 후에 북당의 조윤수를 중심한 세력이 주민을 선동하여 함안 민란이 일어났다.
함안민란은 1894년 1월12일 북당의 선동에 동원된 주민 수천 명이  활터에서  모인 후, 남당의 박용하 첩의 ,이속 한영두, 유기 그릇장 이사홍의 집을 불태우고 이속 조익표, 강태무, 남당 영수 조익규, 박영수, 좌수 조문규 집을 차례로 부수는 소란이 있었고 민란 3일째인 15일에는 향교촌에서 남당의 장정 5~600명이 창의교역기(倡儀矯革旗)를 세우고 머리에는 흰수건을 쓰고 죽창을 쥐고 북당무리와 대치한 것이 함안 민란이다.
“함안민란은 수령(守令)- 이향(吏鄕)의 수탈구조의 모순과 전기적(前期的) 도고(都賈: 매점매석을 통한 독점)상업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농민 항쟁으로 남.북당의 향전의 격화가 도화선이 되어 폭발한 것이다.
이포(吏逋: 아전의 횡령), 민포(民逋: 향반의 횡령)를 주민에게 부담시키니 향회(鄕會)와 면회(面會)를 열어 저항하였고, 개항 이후 일본의 상인의 침투와 이와 결탁한 도고 상업구조의 모순에 대한 농민 항쟁이다.” 즉, 이러한 불합리한 수탈의 구조를 상대방의 탓으로 뒤집어 씌워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함안 민란이 좌절된 이후에는 이 모순구조에 대항,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결전거납(結錢拒納: 전결(田結)에 덧붙여 거두어들이던 세금을 내기를 거부함)이나 화적(火賊)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1899년 대산면 도흥진 나루에서 군대를 칼로 찌르고 안동부대(安東部隊) 공금 3만 냥과 함안군 공금 200냥을 화적에게 강탈당하였으며, 1900년 함안군수 이병익은 이속이나 향반이 횡령한 공금을 족징(族徵: 군포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 대신 일가붙이한테 세금을 물림)하려고 친족을 잡아 가두니 옥이 넘치고 원망이 많다는 진정서를 정부에 내었고, 1903년 함안군수 이인성은 횡령한 공금을 채운다는 명분으로 가렴주구한 착취를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1903년 황성신문)
1905년 4월9일 상오12시에 육혈포와 환도 및 총창을 가진 화적 20여 명이 동헌과 내아를 침입하여 결전(結錢)6,413냥을 탈취하였고 , 군물고(軍物庫)를 파괴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옥문을 파괴하여 결전거납자(結錢拒納者)를 방면한 후에 수서기 집과 김화서 집에 전재와 물산을 탈취하고 순교(巡校) 유국환 집에 불을 질렀다.
집을 잃은 유국환은 크게 깨달아 1920년 봄까지 동지산과 신당곡을 근거지로 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아전과 향반, 일본상인, 일본상인과 결탁한 무리의 재물을 탈취하여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어 함안지방에서는 홍길동에 버금가는 의적으로 존경을 받아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 민란은 백성이 지방방백(方伯)을 대상으로 일어나는데 함안민란은 향반(鄕班)과 이속(吏屬)이 남.북으로 당(黨)을 만들어 향회의 향권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함안향회의 회원은 50여명이고 이속은 222명이다.
향반과 이속이 작당하다보니 반(班)과 상(常)의 격(格)이 무너지고 향반과 이속은 주민을 선동하려하니 자연 사(士)와 농(農)의 신분의 벽이 무너져 함안사회의 변동은 가속화 되었다.
이러한 격(格)과 벽(壁)의 파괴는 특출한 지도자가 없어도 쉽게 많은 시위 군중을 동원하는데 도움을 주어 함안읍의거와 군북의거를 성공적으로 진행 할 수 있었다.
부연하면 향권을 농락한 북당의 주도 인물인 조윤수(대산면), 이유항(산인면), 안응주(가야면) 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3.1운동에 미온적으로 반응한 반면, 북당의 횡포에 반기를 든 남당의 주도 인물인 이동검(여항면), 조우식(군북면), 조익규(함안면) 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치열한 3.1 운동이 일어났다.      (출처: 이규석 著, 함안의 항일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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