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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함안 항일 독립운동사 (咸安 抗日 獨立運動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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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8-2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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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항일 독립운동사 (咸安 抗日 獨立運動史)

제2장 지역별 3.1 운동 및 항일 운동

제1절 지역별 3.1 독립운동

1. 대산면 평림장날 의거

칠북 연개장날 의거가 일어난 3일 후인 3월 12에 당시 대산면 소재지인 평림에서 장날을 기하여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산면에서는 1909년 하기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칠북연개에 있는 새말교회로부터 연개장날의거를 통보받은 하기리교회 지도자인 권영수(權英洙), 최말종(崔末鐘)지사가 의거에 참여하였다.

권영수, 최말종지사는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그날 오후에 대산면 유지와 기독교인에게 연락하여 밤늦게 하기리교회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권영수, 최말종, 김성근(金聖根), 안효중(安孝中), 최갑률(崔甲律), 김용태(金容態), 문덕중(文德中), 김석규(金錫圭)지사를 비롯한 우국지사들은 3월 12일 평림장날에 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대산면 평림교회와 하기리교회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3월 12일 정오 대산평림 장터에서는 태극기가 나누어지고 수 백 명의 군중 앞에서 권영수 지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시위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군중이해산할 무렵에 뒤늦게 출동한 왜경에 의하여 권영수, 김성근 지사가 체포되었다.

3월17일 장날에는 한효중, 최갑률, 김용태, 문덕중, 김석규, 최말종 지사가 앞장서고 수 백명의 의거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에 몰려가서 구속된 권영수, 김성근지사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출동으로 안효중지사가 체포된 후 군중은 해산하였다.

3월 17일 대산 평림 장날의거에서 몸을 피한 최갑률지사는 3월 19일 함안읍내의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학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한 죄로 징역 1년을, 문덕중 지사는 경찰관 주재소와 등기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손한 죄로 징역1년을, 김용태지사는 등기소에 유리창과 출입문을 파괴한 죄로 징역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형공 73호 판결문 )

대구복심법원 형집행원부에 수형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판결문을 발견하지 못한 지사로서 대산명 평림리 김성근 지사가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1919년 4월 28일 징여 6월 형을, 29일에 대산면 하기리 안효중지사가 같은 죄목으로 징역6월을, 평림리 권영수 지사가 동일죄목으로 징역 8월 형을 각각 언도받아 항소를 포기한 4월 29일부터 형을 기산(起算)하여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김석규지사는 대산면 평림리 사람으로 평림장날의거. 함안읍내의거 군북장날 의거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개월 후 석방되었으며 수형한 사실을 동리 사람과 가족은 증언하고 있으나 6.25때 면사무소의 범죄인 명부와 마산지청의 원심판결문이 소실되어 형기를 알 수 없는 분으로 대산면 하기리 최말종지사를 비롯한 여러분이 있다.

대산면 평림장날의거는 함안군 독립유공자 유족회(회장 안인호)가 만든 함안 3.1운동사 편찬 자료에는 3월12일로 되어있고 부사 경남 3.1운동사에서는 3월 17일로 되었다.

여러 정황을 분석해본 결과와 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차 의거는 3월 12일이고 2차 의거는 3월 17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칠서면 이룡리의거

3월18일 오후6시경 하상운(河相運) 진영우가 주동이 되고 이룡이 주민 수 백 명이 궐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룡리 일대를 시위행진하고 야노 도미수께(矢野福助)등의 일본사람 집에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일본사람들의 오만 방자한 행동과 경제적 침탈을 규탄하고 일본사람은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사세(事勢)가 불리함을 깨달은 간교한 야노(矢野)는 손이 발이되라 빌면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약속하므로 시위군중은 순진하게 이를 믿고 밤 9시경에 해산하였다.

칠서 이룡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여 만든 하안(河岸) 충적토는 관배수(灌排水)가 용이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짓기 매우 좋은 곳으로 큰 강이 범람할 때마다 논밭의 경계가 달라지니 하천부지가 많았다.

간교한 일본사람은 하천부지를 사유화하고 경계와 소유자가 명확하지 않은 토지를 침탈하였으며 소농(小農)을 흡수하여 핌략의 기틀을 다져가는과정에서지주인 진영우를 비롯한 주민들과 마찰이 많았다.

본의거를 주동한 하상운(河相運)지사는 밤을 세워 함안읍으로 피신하여 익일인 3월 19일 함안의거에 참여 경찰관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하고 보통학교에서는 만세를 부르면서 학생들에게 시위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학생들이 가담하지 않으니 학교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한 죄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부연하면 일본사람은 칠서면 이룡을 중심으로 삼칠면과 남지 영산읍을 한 권역으로 삼아 략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1936년 그 기초 작업으로 칠서이룡에 공립중학교를 세우려고 터를 닦을 때 민족세력을 대표하는 함안향교가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중학교는 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며 가야읍 도항리 당산동에 있던 향교 소유 토지를 기증하여 세운 학교가 바로 함안 중학교와 함안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3.함안읍 의거

1905년에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은 반만년의 긴 민족사에 최대의 오점을 남긴 비극이였다.

주권을 빼앗긴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리사욕과 매관매직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잃게 한 대부분의 지도층은 서서히 몰락하고 일제의 무단정치와 경제적 수탈은 나라 잃은 백성들의 목줄을 조여 대성통곡을 할 수 있는 자유마저 앗아간 음울한 상황에서 고종황제는 붕어(崩御)하였다.

민족의 마지막 보루이던 고종황제마저 승하(昇遐)하니 삼천리 방방곡곡 울음바다가 되었다.

충의의 고을인 함안에서도 국상을 좌시하지 않고 조한휘(趙漢輝), 한종순(韓鍾淳), 이찬영(李讚榮), 조병흠(趙丙欽), 박건병(朴鍵秉, 동명학교 교사, 강원도철원),강기수(姜琪秀, 동명학교 교사 산청), 한관열(韓灌烈) 지사 등을 포함한 많은 지사들이 3월 3일 봉행되는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3월 1일 서울에 도착하니 독립만세운동은 온 장안을 휩쓸고 있었다.

함안에서 올라간 지사들이 만세운동과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간직하고 귀향한 것은 3월 5일 경이었다.

곽종한(郭鍾漢), 조한휘, 이찬영, 한종순, 한종헌, 이희석, 안재형, 안영중, 안재원, 안재휘, 박건영 등 여항면 지사들은 이중건이 설립한 동명학교를 거점으로 하여 군중의 동원, 태극기의 제작, 독립선언서 등사 등이 진행되었다.

함안읍의거의 행동대장이요, 실질적인 지도자인 이희석 지사는 동명학교와 안신학교를 총괄하고 안지호 지사와 같이 함안전역을 지휘하였고, 여항면 산서지역은 박노일 김상집 조병대 지사가, 가야면에는 백낙삼, 안갑중 지사 등이 군중의 동원에 앞장섰다.

함안읍의거의 준비과정은 이찬영지사의 대구복심법원 항소심 판결이유에서 재판장은 “조한휘 등이 서울에서 가지고 온 선언서는 장문장(長文章)으로 한 장으로 등사하기 어려워 이기석이 개작하고 이희석이 인쇄하여 시위현장에서 이찬영이 배포하였다”고 판시하였으며 이판영지사의 대구 고등법원 상고심판결이유에서 재판장을 3월 15일 오후 9시경 안신학교에서 이희석, 이찬영, 한종순, 조병흠, 김도권, 조동억, 구정훈, 한관열, 조문극 등이 조선독립에 대한 협의를 하려는 것을 주재소 형사가 알고 단속하니 해산하였다가 다시 한종순 집에서 협의하였다.

다음날인 16일 조병흠, 한관열 등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조동벽의 방에서 안신학교 등사기를 김도권이 가져와서 이희석, 이찬영, 조병흠, 조한휘, 김도권 등이 수 백매 인쇄하였다.

이때 한종순은 자기집에서 구한국기(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판시하였다.

규합된 동지들은 각지로 밀파되어 군중을 모이게 하였다.

함안장날이며 거사일인 3월 19일 아침부터 군중은 속속 모여들었다.

주동인물과 규합된 의거군중은 약속대로 함안면 봉성리에 있는 이찬영지사의 집 주변에서 이희석 지사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난후 이희석지사의 지시에 의해 군중들은 일제히 봉성리에 모여들었다.

이때에 개작 축소한 독립선언전단과 태극기가 나누어지고 태평루(太平樓)에는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민족의 염원을 절규하는 독립선언문을 이희석지사가 낭독하였다.

독립선언문 낭독이 끝난 오후 2시경 3천여명의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성난 사자와 같은 시위군중은 함안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갔다.

돌을 던지면서 몽둥이를 들고 함안경찰관 주재소를 6회에 걸쳐 습격하여 유치장, 담장, 출입문, 사방의 유리, 벽을 파괴하고 서류와 공문을 흐트려 흙발로 짓밟아 못쓰게 만들고 경찰서장과 순사부장을 구타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사실 증명서를 발급하라고 강요하였다.

함안군청의 정문과 사무실 출입문, 창문유리 등을 파괴하고 함안군수를 끌어내어 군수의 제복을 찢고 운신하지 못하게 폭행을 가하여 강제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우체국의 직원을 폭행하고 전화선을 절단하고 담장을 헐어버리고 우편상자를 뜯어내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전화교환기를 파괴하였으며 함안심상소학교, 함안공립보통학교, 등기소 등에서도 이러한 공격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함안읍의거의 시말(始末)을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의 대정 8년 형공 제73호 판결문과 대구복심법원 항소심에 대한 판결문등을 통하여 의거 상황이 소상히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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