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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삼국지<三國志>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아라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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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2-0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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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아라가야

c1b6c1a4b7a1.jpg 조정래(52) 함안문인협회장은 함안군 공무원이다. 현재 함안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문화예술을 담당하고 있다.

1995년 장편 관념시 출발을 함안문학에 발표한 후 시인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에 대한 의문점에서 역사서적을 읽다가 함안을 중심으로 수준 높은 철기와 토기문명을 이룬 아라를 재조명하는 것이 임나일본부를 극복하는 길임을 깨닫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아라가야의 역사를 알리고자 기획된 잊혀간 왕국 아라시리즈를 5권이나 출간했다. 지난 7월 출간한 고대 함안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설 검은 바다의 소용돌이가 다섯 번째다. 10권의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다.

조 회장은 오랜 연구로 아라가야 역사에 정통하다. 이번 함안문학 제 27호에 말이산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기원 하며 <삼국지><삼국사기>를 통해 아라가야를 조명하는 글을 게재했다.

통상 역사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반면 조 회장은 문학인 특유의 간결한 필치와 쉬운 어법으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썼다. 함안뉴스는 아라가야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조정래 회장의 글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삼국지와 삼국사기

삼국지三國志는 진수(233-297)가 지은 역사책으로 오늘날 우리가 삼국지라며 흔히 읽는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 三國志通俗演義의 원형이 된 책이다.

조조가 황건적을 물리치며 기틀을 닦은 위, 유비가 세운 촉, 손권이 세운 오 등 세 나라의 역사를 적은 것으로 촉에서 태어나 벼슬을 하다가 쫓겨난 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서진(西晉)에서 벼슬을 했으므로 위를 정통으로 하면서 세 나라를 적고 있다.

280년 오나라가 망한 이후에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291년 사망한 하후담이 생전에 삼국지를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290년을 전후해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위나라의 역사를 적은 위서(魏書, 위지魏志라고도 합니다)에 동이전(東夷傳)이 첨부되어 있는데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 삼한, 왜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는 고대 우리나라의 풍습과 정치변동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하지만 동이전은 저자인 진수가 직접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닌 만큼 잘못된 것도 많으며 이와 관련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오류를 지적한 부분도 많다.

한편,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다. 50권으로 본기 28(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 제사, 음악, 복색, 지리, 계급체계 등) 9, (중국, 고구려, 신라, 백제의 역사를 연도별로 정리) 3,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옥해 玉海1174해동삼국사기 海東三國史記를 헌서한 것으로 보아 편찬 직후부터 간행됐음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편찬 당시 책의 정식 명칭이 해동삼국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차 판각이 13세기 후반에 이루어지는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현존하는 삼국사기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나머지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통역사서로 치부되는 이삼국사기는 사실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의 정통을 적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단재 선생이 1924.10.13.부터 1925.3.16.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문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한 조선사연구초를 보면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는 단락에서 묘청으로 대별되는 화랑불가의 국풍파(國風派)와 김부식으로 대별되는 유가의 한학파(漢學派)가 맞붙은 1135년의 서경전쟁을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사건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화랑을 원수처럼 여긴 김부식이 전쟁에서 승리해 유교적, 사대적, 보수적 사상으로 삼국사기를 적는 바람에 국풍파의 진취적인 기상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는 중국역사책에도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활약을 빼버린, 503년이 되어서야 겨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던 나라를 우선시하면서 그 이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뛰어난 역사를 지워버린, 그래서 일제가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수거해 모두 불태운 뒤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정통역사책이라고 내놓을 수 있었던, 지금도 그 여파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엉터리 낭설로 치부해 버리는 사학자들이 즐비한 원인을 제공한 책이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있을 때는 안야국, 아라국, 아시랑국 등으로 존재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왜를 통일한 후 안라국으로 통칭되던 아라가야에 대한 역사를 거의 지워버린 것은 신라가 아라가야에 의해 핍박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삼국지나 삼국사기를 읽지 않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삼국지나 삼국사기를 보고나서 그 내용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아라가야에 대한 내용을 훑어보면서, 특히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국지의 아라가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마한을 중심으로 기술한 한()과 진한(辰韓), 변진(弁辰)을 따로 적고 있는데 마한에는 55, 진한에 12, 변진에 12국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으며 아라가야는 그중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다.

변진전에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또 마지막 구절에 12국에도 왕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가 모두 장대하다.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하다고 나와 있다. 이에서 세력이 큰 왕은 신지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한전을 보면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국의 유지보, 안야국의 축지(踧支), 신분활국의 불례, 구야국의 진지렴 등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는 구절이 있다.

세력이 큰 왕을 신지라 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더 우대한 네 나라 중에 아라가야가 있다는 것은 아라가야가 당시에도 위세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어떤 학자는 안야국이 구야국보다 먼저 나온다는 점에서 더 위세가 강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인구를 보면 마한의 경우 큰 나라는 만여 가구로 나오고 변진은 큰 나라가 사오천 가구로 나온다. 아라가야에 신지를 우대하는 별호가 있다는 점에서 아라가야도 오천에서 일만 가구에 달하는 큰 나라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풍습에 대한 구절을 보면 토지가 비옥해 오곡과 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와 뽕이 있어 비단과 베를 짤 줄 알고 소와 말을 탈 줄 안다. 혼인하는 예법이 남녀가 다르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해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철이 생산되어 여러 나라에서 사 가는데 모든 매매가 철로 이루어져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는 악곡도 있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머리를 돌로 눌러서 편두로 만든다. 왜와 가까워 문신을 하기도 한다.

<!-걸어 다니며 하는 전투를 잘하며 무기는 마한과 같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모두 양보한다. 진한사람과 뒤섞여 살며 성곽이 있다(마한에는 성곽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법이 달라서 문의 서쪽에 부엌신을 모신다.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

위의 기록에서 아라가야가 철의 제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은 덩이쇠(철정, 鐵鋌)의 형태로 수출된다. 철광석을 로에 넣고 녹이면 쇳물이 흘러나오는데 이를 식힌 다음 대장간에서 다듬어 모양을 낸 것이 철정이고 이를 두드려 칼이나 갑옷, 투구, 미늘쇠 등을 만들 수 있다.

갑옷 등은 가공시간과 노력에 따라 가치의 차이가 있게 되므로 화폐로는 적합지 않고 그 때문에 표준화된 가공단계를 무게를 가진 철정이 수출이 되고 또 화폐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정은 탄소함량이 높아 부식이 잘 되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흡착되어 몇 개인지도 알아볼 수 없게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말이산고분군을 비롯한 함안의 고분군에서는 철정이 많이 출토되고 있고 함안박물관에도 여러 개가 전시가 되어 있는데 철정이 많은 것은 그만큼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라가야가 3647월 백제의 침입을 받아 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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