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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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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0-1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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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보다 빠른 전국 최초의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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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李伶)장군 창의비(倡義碑)와 충신 정려각(忠臣 旌閭閣)이령(李伶)장군의 창의(倡義: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비(碑)는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검암천 기슭에 충신(忠臣)정려각(旌閭閣)과 함께 서있다).


바람이 쌀쌀한 일요일 아침, 가야읍 검암리에 소재한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장군의 충신정려각(旌閭閣)을 찾았다.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 1541~1592)장군은 함안군 검암리 출신으로 임진년(1592년 4월 14일) 왜구가 부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1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서 김해성으로 달려가 동문 수문장으로 왜적을 무수히 참살하고 4월 20일 장렬히 순절(殉節)했다.

이령 장군이 전사한 다음날 의령의 곽재우 장군이 집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그 이튿날인 4월 22일 의병출정식을 가졌다.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세상에 공포하기 이틀 전, 이령장군은 이미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임진왜란 중 최초 의병장이었던 이령장군에 대한 행적(行跡)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순절(殉節)한 성산(星山- 廣平) 이씨(李氏)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 장군은 함안 검암(儉巖)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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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당(忠順堂): 이령장군의 사당인 충순당은 검암리 상검마을에 있다)

이령(李伶) 장군의 자는 여윤(汝允)이요, 호는 충순당(忠順堂)이고, 이름은 (伶)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중종 36년(1541년) 검암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왜군이 부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마을에서 장정 백여 명을 모아 김해로 달려가 김해성에서 왜군을 맞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싸우다 장렬히 순국(殉國)했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때가 4월 14일이요, 순국한 때가 4월 20일이니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보다 이르다.

전국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 8700명의 육군의 정규 병력을 원정군으로 편성하여 9번대(番隊)로 나누어 조선을 침공하도록 했다

이밖에 수군과 정규 전투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제1번대 주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은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 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52세의 이령 장군은 다음날인 4월14일 즉시 1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백리 길도 마다않고 김해성으로 달려가 참전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자 효시(嚆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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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도주하려 하자 “나라의 존망(存亡)이 눈 앞에 있는 데 어찌 목숨 아까워 도망갈 수 있겠느냐”며 크게 꾸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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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래성이 함락되고 얼마 후 왜적의 대군이 밀려오자 김해부사(金海府使)인 서예원(徐禮元)은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주하며 성안의 주민들과 군사들에게 퇴각을 권하자, 선생은 “나라의 존망이 눈 앞에 있는 데 어찌 내 한 목숨 아까워 도망갈 수 있겠느냐”며 크게 꾸짖고는 데리고 간 둘째 아들 명화(明惒)에게 피묻은 적삼(血衫)을 벗어주며“만약 내가 죽거든 이 옷으로 장사를 지내거라”하고는 동문의 수장이 되어 왜적을 참살하고 격퇴했으나 끝없이 왜군들이 밀려오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적을 당하지 못하고 김해성이 함락되면서 순절(殉節)했다.

결국 김해부사 서예원은 달아나고 의병들만 백성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크게 비난을 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이르는 곳마다 패전하였으니, 용서 할 수 없을 것 같사오나, 지금은 바야흐로 왜적을 대항할 때이므로 잠깐 동안 백의종군(白衣從軍)시켰다가 뒷날에 책임을 묻기로 하고, 그 대리직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차출시키도록 하소서”하고 비변사(備邊司)가 보고하자 임금은 이에 따라 김경로(金敬老)를 김해부사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그 이듬해 4월 서예원은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예원은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숲속으로 도망쳐 있다가 살해당하였다.

이를 미루어보아 보아 난리 가운데 아무리 인재가 없다 손 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벼슬아치들의 기강(紀綱)이 말이 아니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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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사(成人祀):매년 음력 4월 20일에 후손들이 제례를 지내는 성인사. 역시 검암리 상검마을에 위치해 있다)

당시 김해성 전투에서 이령장군의 활약은 동경대와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한 바있는 김성한(金聲翰) 작가의 대표작인 소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잘 묘사되어있다.

『 전략(前略)- 적이 김해에 몰려왔다.

김해는 둘레가 4천6백83척의 석성(石城)으로 동래성보다 큰 성이었고 높이도 15척으로 2척이 더 높았다.

하지만 지킬 병사가 없었다. 난리가 터지자 부사 서예원은 관원들을 시켜 사방에서 장정들을 끌어들이고 가까운 고을에 도움을 청했으나 겁먹은 백성들은 도망쳐 숨는 바람에 겨우 200여명의 장정들을 긁어 모아 성위에 늘어세웠다.

돕겠다고 달려온 사람은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 한 사람이였다.

오늘 아침 백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성내에 들어온 이유검은 성내 주위를 훓어보고는 서예원에게 “영감, 적은 만 명도 넘는다는데 이 핫바지 300명으로 막아낼수 있소?”하고 물었다.

서예원은 “나도 걱정이오”하고 답했다.

그러자 이유검은 투덜대며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건데...” 라고 말하자 서예원이 눈을 찡긋하며 의미있는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의병들을 모아 여기에 뛰어든 사람은 바로 함안(咸安) 땅에 사는 이령(李伶)이라는 선비였다.

금년 52세의 이령은 낮에는 땅을 파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평생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백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이령은 성현의 말씀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람이었다.

나라에 걱정이 있으면 앞장서 나가는 것이고 싸워서 죽는 것은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들 명화(明惒)를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정 100명을 모아 가지고 김해로 달려왔다.

“고맙소” 부사 서예원은 두손을 잡고 반겼으나 이유검과 주고받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묻지 않아도 남들이 도망가는 판에 제발로 지옥에 뛰어드는 얼간이로 치부하는 그 속내가 들여다 보였다.

“동문을 맡아 주시오” 이령에게 이렇게 부탁한 서예원은 이유검을 서문에 배치하고 자신은 남문을 맡았다.

괴나리봇짐을 풀고 보리밥덩이를 씹는데 왜군이 낙동강을 배로 올라와 떼를 지어 성을 둘러쌌다.

겁에 질린 초계군수 이유검은 이미 내뺏고 이유검을 찾는다는 구실로 도주하려는 서예원을 잡고 이령은 다짜고짜 멱살을 틀어잡았다.

“너 도망갈 구실을 찾는거지?”

“오...오해요...”

“적중에 나가 누구를 찾는단거냐”주먹으로 턱을 쥐어박았다.

“정말 아니오. 내가 안나가면 오해는 풀릴 것 아니오”

“주장이 도망치면 성은 어떻게 되지? 한걸음이라도 나갔다가는 모가지를 잡아뺀다” 그는 서예원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털고 일어선 서예원은 한 걸음 내디뎠다. “ 너 어디가지?” “남문에 가서 제자리를 지켜야 지요”이령은 잠시 생각하다 함안에서 함께 온 장정 세 명을 딸려 보냈다.

“잠시라도 떨어지지 마라”

긴장 속에서도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 잠시 잠이 들자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놓쳤습니더”서예원을 따라갔던 장정들이었다.

“놓치다니?” 이령은 그들을 쳐다 보았다.

“뒷간에 가신다기에 내사 마 방심한게 아잉기오”이령은 일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유검에 이어 서예원마저 사라지니 성내에는 장수가 없었다.

희미한 달 아래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서문 쪽에서 하나 둘 성을 넘어 자취를 감추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은 도망가고 객만 남았으니 우리처지가 야릇하지 안십니꺼?”

정정들은 불평이었으나 이령은 한마디로 가로막았다.

“나랏일에 주인이고 객이고 없다”

“하지만 신명이 나야 싸우지예”맥이 빠진 장정들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령은 아들 명화를 불러 피묻은 옷을 넘겨주며“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 옷으로 장사를 지내라”하고 말했다.

성내의 혼란이 적에게 전달됐다.

왜군들은 수비없는 성문을 밀고 몰려왔다.

이령을 비롯한 동문을 지키던 의병들은 칼을 단단히 붙잡고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적중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적들을 향해 종횡무진 칼을 휘두르던 장정들은 적과 함께 하나 둘씩 쓰러졌다.

왜적 다섯 명을 무찌른 이령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제 잠시다. 모든 것이 끝나리라”라며 칼을 쳐드는 순간 옆에서 날아온 총알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고향함안의 땅과 하늘이 거꾸로 핑돌고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그들의 시체를 밟고 성내로 밀려든 적들은 성내에 남은 남녀노소 천여 명을 학살하고 불을 질러 김해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후략』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선생의 기개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령선생의 백씨(伯氏: 맏형)인 황곡(篁谷) 이칭(李偁)선생은 의령으로 가서 같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하(門下)이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황곡 선생의 첫째 아우인 검계공(儉溪公) 이길(李佶), 큰아들 매죽헌(梅竹軒) 이명호(李明怘)를 비롯해 여러 아들, 조카와 함께 전장(戰場)을 누비며 큰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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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東山亭): 성산(星山)이씨는 세종(世宗)치세연간(治世年間)에 정3품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동산(東山) 이호성(李好誠)때부터 함안검암리 상검마을에 정착했다. 가야읍 검암리 상검마을에 있는 동산정)

이령(李伶)선생은 명문가(名文家)의 후손이었다.

선생의 고조부는 병조판서 정무공(兵曹判書 靖武公) 호성(好誠)으로 호는 동산(東山)이다.

조선왕조실록 제8권 62항에『세종은 李好誠을 청백리로 칭하면서 “관직에 있을 때 직분을 다하여 털끝만큼 법을 어기는 경우도 없이 선정을 베풀었고, 재산에도 무관심하여 의복도 좋은 것이 없었다”라며 칭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조부는 봉사공 (奉事公) 처인(處仁) 이시며 할아버지는 해남공 순조(順祖)이신데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아버지 사직공 사허(士詡)는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무반직(武班職)에 종사했다.

큰 형님은 황곡(篁谷)선생이고 둘째는 검계공(儉溪公) 길(佶)이며 아우는 학성공(學性公) 전(傎)이다

이령선생은 명문자손의 후예로 검암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품이 뛰어났다.

6세에 사략(史略)을 익혔으며, 10세에 소학(小學)을 읽고 충(忠)과 순(順)이란 두 글자를 벽에 써붙여 두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함”을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훗날에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13세에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어 진혈을 했으며 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며 시묘(侍墓)를 했다.

그러다 왜군이 침략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들을 모으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이다.

이후 이령의 부인 벽진(碧珍) 이씨(李氏)는 난중에 틈을 타 김해까지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유언대로 피 묻은 옷으로 초혼을 하며 장사를 지냈다.

무덤은 함안 동지산(冬只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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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즉시 의병 이끌고 김해성으로 참전, 성주는 도망가고 의병들만 성(城) 지키며 싸우다 순국,      고향인 검암리 동지산(冬只山)에서 혈삼(血衫)으로만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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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선생의 혁혁한 공적과 충성심이 수 백년 간 묻혀 있다가 뒤늦게 조정에서 알고 고종 6년(1869년)에 충의를 찬양하기 위해 가야읍 검암리 상검동 길목에 충신의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으며, 고종 17년 (1880년)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에, 고종 22년(1885년) 에는 통정대부이조참의 (通政大夫吏曹參議) 정3품 당상관으로 증직되었다.

c5a9b1e2baafc8af_bbe7babb_sl_027.jpg (◀정 3품인 통정대부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 로     증직(贈職) 되었다는 교지(敎旨)

선생 사후 293년만의 일이다.


정부는 1980년에서야 충순당과 성인사(成仁祠, 별묘), 정려, 묘소 등을 정비했다.

이후 선생의 행적은 또다시 역사 속으로 묻혔다가 후손들의 요청으로 재실과 정려각이 2011년에 이르러서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530호로 지정되었다.

그에 비해 이령장군과 같은 시기 김해성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던 김해 4충신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 등 4명은 사후 8년 뒤에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김해에 사충단(四忠壇)을 세워 매년 음력 4월 20일 4충신에 대한 향례를 지내고 있다.

또한, 김해의 사충단은 지난 95년 국도비 20억원을 들여 복원사업을 하고 경남도 문화재 제 99호로 지정되었다.

이령장군은 나라를 지키다 순절하였으나 김해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4충신에서 빠져있으며 선생이 순절한 임진년 4월 20일에 후손들이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해 이령장군의 직계 13 세손(世孫)인 이쾌권(65)씨는 “후손들이 미약한 탓으로 선대의 훌륭한 행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라며 “선조라서가 아니라 국난에 빠진 나라를 위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성주가 달아난 김해성을 지키고자 싸우다 순절한 분이라면 마땅히 김해에서도 배향(配享)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향토의 훌륭한 인물을 발굴해 널리 알려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동안 이령장군은 그 행적에 비해 너무나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다.

국난을 겪고 4백년이 흐른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옛일로만 치부하고 예사롭게 넘겨질 수는 없을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령장군의 행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널리 알려야 함은 너무나 자명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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