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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몽골 국왕 어의(御醫)였던 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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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2-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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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국왕 어의(御醫)였던 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의사의 치열했던 삶과 혁명적 독립운동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815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며 독립운동가 6명의 이름을 직접 호명했다. 

이때 문 대통령은 의열단원이며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라며 이태준 선생을 설명했다. 

몽골에서 의술을 베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대암 이태준 선생은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몽골 국가훈장을 몽골 국왕으로부터 직접 수여했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여운형은 그의 저서 <몽고사막 여행기>에서 몽골 고륜의 한 구릉에 위치한 이태준의 묘를 방문한 뒤 애도의 문장을 남겼다.  

이태준 선생은 지난해 보훈처로부터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에 본지는 5회에 걸쳐 치열했던 이태준 의사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제공: 국가보훈처>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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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이태준(李泰俊, 1883~1921)은 몽골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한 인물로서 한국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태준은 몽골국왕(Bogd Khan)으로부터 제1급 관리등급의 국가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금강석이란 뜻)를 수여받은 인물로 오늘날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태준은 또한 19212월초 몽골을 침범하여 살육과 노략질로 공포와 광란의 폭압정치를 실시한 러시아 백위파 대장 운게른 스테른베르그(Roman von Ungern-Sternberg, 1885~1921) 부대에게 학살당한 비운의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의 삶  

이태준의 자()는 원일(元一)이고, 호는 대암(大岩)이다. 몽골정부의 공식문서에는 고려국 국적민 의사 리다인으로 나오는데 다인은 이태준의 호인 대암을 몽골어로 표기한 것이다. 당시 이태준이 본명 대신에 호인 대암을 사용했고, 몽골에서도 그렇게 통용되었다. 

이태준은 18831121일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태준은 2형제의 장남으로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태준의 부인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사망하여 두 딸은 그의 동생인 이태식이 맡아 길렀다. 이태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한성(서울)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생가 근처 산 너머에 위치한 기독교 교회에 다녔던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 선교사를 통하여 의료선교사가 설립했던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은 24세인 1907101일에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였고, 39개월만인 1911621일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담하였다. 안창호는 1909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직후 이갑, 이종호, 김구, 김명제, 임치정 등 서북인사들과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910220일경에 석방된 후 세브란스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가 최남선에게 이태준을 추천하여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한말 애국계몽운동단체들 가운데 공화주의적 정치 이념을 취하고 있던 인사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였고, 그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 역시 진취적인 젊은 청년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세브란스의학교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하여 기독교와 서구적 사상을 접하게 된 이태준이 청년학우회에 참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국으로의 망명  

19108월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후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많은 애국 청년들이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다. 이들은 오랜 순치관계(脣齒關係)에 있는 중국의 혁명운동에 희생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중국혁명세력들로부터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태준과 함께 몽골로 가게 되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나, 1921년 가을 몽골을 방문하여 이태준의 묘를 찾게 되는 여운형(呂運亨, 1885~1947) 역시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다. 망국의 아픔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던 한국청년들에게 중국의 신해혁명(1911)은 큰 자극을 주었으며, 특히 중국혁명의 영도자로 알려진 손중산(손문, 1866~1925)은 한국청년들의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애국지사들, 특히 의병운동 참가자들은 국경지대인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신해혁명 이후에는 상해, 남경, 광동 등 중국 관내지역으로 망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태준은 중국의 남경에서 미국의 안창호에게 보낸 1912716일자 편지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날로 심화되는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분개하던 차에 19111010일 무창(武昌)봉기를 시작으로 전개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했다. 

이태준이 망명을 단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 총독부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배일적(排日的)인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때문이었다. ‘105인 사건191011월 일본 총독 테라우찌(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 관련자 체포로 시작된 검거 선풍 이후 19123월경까지 고문취조가 지속되었고, 19126월 공판이 시작되어 10월 중순에 제1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태준은 친구이자 선생이기도 한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김필순(金弼淳, 1878~1919)과 함께 중국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초 김필순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위기에 처해 있어서 먼저 국내를 탈출하고, 이태준은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이태준에 앞서 김필순 역시 미국의 안창호에게 191238일자 편지를 보냈다. 김필순은 191110월 발생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하고 이 혁명운동에 위생대(衛生隊)로 참여하기 위하여 중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마침내 19111231, 김필순이 먼저 신의주의 세브란스분원에 출장 간다고 하고 경의선 열차에 올랐는데, 김필순의 망명에는 여동생인 김순애(金淳愛)가 동행하였다. 김순애는 후일 이태준과 몽골로 동행했던 김규식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김필순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뜻밖에도 자신과 김필순이 중국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병원 내에 퍼져 있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평양행 열차를 타고 부랴부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국내탈출에 성공한 이태준은 중국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이태준은 남경에서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에서 국내탈출 후 중국 남경에서의 근황과 심경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태준은 남경으로 왔지만 여비가 끊어진데다가 언어장벽 때문에 적막(寂寞)한 정형(情形)을 많이 지냈다고 적었다. 그러다가 이태준은 가까스로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취직하게 된다. 이태준은 기독회의원에서 의원(醫員)의 직임(職任)을 착득(着得)하였사오나 5, 6삭 동안은 아주 자미 없이지냈다고 썼다. 

편지를 쓸 무렵인 1912년 중반, 이태준은 중국의 혁명정당 인물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여섯 명의 한인유학생들도 만났다. 유학생들 가운데 김규극(金奎極), 권탁(權鐸), 홍윤명(洪允明) 등 세 명은 학생군(學生軍)에 가담하여 국민당의 북벌에도 참전하였고, 북벌 후에는 육군학당에 입학하여 각종 무예(武藝)를 연습하고 있었다. 당시 이태준은 김필순과의 연락을 간절히 원하여 안창호에게 연락처를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몽골로 간 이태준이 그 후 북만주의 치치하르(Chichihar)에 있던 김필순과 연락을 확보하거나 만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현재로서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무렵 이태준은 서간도의 한인자치단체 부민단(扶民團)이 설립한 군관양성학교인 신흥학교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 후원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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